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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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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리마을의 절터에 남아 있는 석탑으로, 경주에 있는 석탑 가운데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과 비교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순백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나원 백탑(白塔)’이라 부르기도 한다.
2층 기단(基壇)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으로, 기단과 1층 탑신의 몸돌, 1·2층의 지붕돌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은 각 면마다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는데, 가운데부분의 조각을 아래층은 3개씩, 위층은 2개씩 두었다. 탑신부는 각 층 몸돌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경사면의 네 모서리가 예리하고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있어 경쾌함을 실었고,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부서진 노반(露盤:머리장식 받침)과 잘려나간 찰주(擦柱: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지탱하는 쇠꼬챙이)가 남아있다.
짜임새있는 구조와 아름다운 비례를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부근에서는 보기 드문 5층석탑으로, 탑이 지니고 있는 듬직한 위엄에 순백의 화강암이 가져다주는 청신한 기품이 잘 어우러져 있다. 높은 산골짜기에 우뚝 솟은 거대한 모습에서 주위를 압도하는 당당함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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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 옛 절터에 남아 있는 탑으로,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1975년에 보수하였는데 이 때 윗층 기단의 북쪽 가운데돌을 새로 보충했을 뿐 대부분은 원래의 모습대로 잘 남아있다.
아래층 기단은 밑돌·가운데돌·맨윗돌을 모두 붙여서 4장의 돌로 짰고, 가운데돌의 모서리와 네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겨두었다.
윗층 기단에도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에서도 역시 몸돌의 네 모서리에 기둥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커서 탑 전체에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밑면의 받침수는 각각 4단씩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기단부의 섬세한 조각과 완벽함에 비해 탑신의 꾸밈이 형식화된 면이 보인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석탑양식에 간략과 생략이 심했던 9세기 말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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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나무는 덩굴식물로 꽃은 보통 가지 끝에 달려서 나오고, 5월에 연한 자주색으로 핀다.
오류리의 등나무는 4그루가 있는데, 2그루씩 모여서 자라고 있다.
나무의 높이는 11∼12m, 둘레는 각각 0.24m, 0.28m,1.72m, 0.60m정도 되는 큰 덩굴나무이다.
오류리 마을 입구 작은 개천 옆에 위치하고 있는데, 옆에 있는 팽나무와 얼키고 설켜서, 팽나무를 얼싸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등나무가 있는 이곳은 신라의 임금이 신하와 더불어 사냥을 즐기던 곳으로 용림(龍林)이라고 불렀는데, 이 용림에 있는 등나무라 해서 용등(龍藤)이라 했고, 굵은 줄기가 다른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모습이 용처럼 보여 용등이라 하기도 했다.
이 등나무의 꽃잎을 말려 신혼부부의 베개에 넣어주면 부부의 애정이 두터워진다고 하며, 사랑이 식어 버린 부부가 잎을 삶아 먹으면 사랑이 되살아난다고 하여 이곳을 찾는 이들이 있는데 이러한 믿음이 생긴 까닭은 다음과 같은 전설 때문이다.
신라 어느 때인가 이 마을에 살던 한 농부에게 아름다운 두 딸이 있었다.
옆집에는 씩씩한 청년이 살았는데, 이 자매는 둘 다 몰래 마음 속으로 옆집의 청년을 사모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청년이 전쟁터로 떠나게 되었을 때, 두 자매는 비로소 한 남자를 같이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다정하고 착한 자매였으므로, 서로 양보하기로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어느날 뜻하지 않게 그 청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자매는 서로 얼싸안고 슬피 울다 그만 연못에 몸을 던졌다.
그 후 연못가에서 두 그루의 등나무가 자라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죽었다던 옆집의 청년은 훌륭한 화랑이 되어 돌아왔다.
자신 때문에 죽은 자매의 이야기를 들은 청년도 스스로 연못에 몸을 던졌는데, 그 자리에서는 팽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고 한다.
등나무는 이 팽나무를 칭칭 감아 올라가고 있으며, 살아있을 때 이루지 못한 사랑을 죽어서 이룬 것이라 한다.
오류리의 등나무는 애틋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으며, 우리 조상들의 정서가 진하게 배어있어 오래된 나무라는 생물학적 가치 뿐만 아니라, 경주 지역에 전해지는 전설을 간직한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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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는 신라 제28대 진덕여왕(재위 647∼654)의 무덤이다.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신라의 2번째 여왕으로 본명은 승만이다.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갈문왕과 월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신라의 마지막 성골 출신 왕이다.
7년간 왕으로 있는 동안 국력을 기르고 당나라와 적극적 외교를 통해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여,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무덤은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이고, 아래부분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였다.
둘레돌 사이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12개의 탱석을 끼워 넣었는데,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새겼다.
그 위에는 긴 돌을 한번 더 올려 놓았는데, 뒤에 보수하여 원래의 것이 아닌 것도 있다.
둘레돌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돌난간을 세운 듯하나 지금은 거의 다 없어져 남아있지 않다.
무덤 앞에는 이외에 별다른 석조물이 없고, 최근에 만든 통로와 축대가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54년에 왕이 죽자 ‘진덕’이라 하고 사량부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사량부는 현재 경주 시내의 서남쪽 일대로 짐작되는데, 이 무덤과는 정반대 방향이다.
무덤 형식도 제33대 성덕왕 이후에 발달한 형식이고, 12지신상의 조각수법도 신라왕릉의 12지신상 중 가장 늦은 것이다.
이런 점을 들어 이 무덤이 진덕여왕의 능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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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선생이 동학 천도교를 득도하신 천도교의 성지.
구미산 기슭의 40만평 넓은 땅에 들어서 수도원 시설이 용담정이다.
입구의 포덕문을 들어가 최제우선생님의 동상을 왼쪽에 끼고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가장 높은 곳에 용담정이 있다.
본디 용담정은 처음 지었던 용담정사를 최재우가 용담정이라 고쳐 부르고 수도에 전념하시던중 득도 했다고 한다
1975년 현대적인 모습으로 대대적인 성역화작업을 거쳐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용담정은 최제우가 포교를 하고 「용담유사」를 쓴 곳으로 현재 구미산 기슭 약 40만 평의 땅에 들어선 수도원 시설이다.
입구까지 도로가 포장돼 있다.
입구에서 몇 개의 문을 지나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가장 높은 곳에 용담정이 있다.
이 건물은 1975년 시멘트 건물에 기와를 올린 것으로 용담유사에 나오는 옛 용담정은 아니다.
용담정 안에는 천도교의 기도의식인 청수봉존( 수운이 참형을 받을 때 청수를 받들고 순교함 따라 일체의 식을 갖는다는 의미로 청수를 떠놓고 기도함)을 할 수 있도록 자리가 마련돼 있고 영정이 하나 있을 뿐 장식이 하나도 없다.
정갈함이 지나쳐서인지 초라함마저 느껴진다.
동학은 "사람이 곧 한울" 곧 인간 절대 존엄의 기본정신을 주장하여 19세기 말 사회적 불안기에 핍박과 수탈을 당하던 민중들 사이에 큰 지지를 받았으나 곧 관의 탄압대상이 되어 피지 못한 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정신은 보이지 않는 지하에서 더 튼튼한 거름이 되어 훗날 갑오농민전쟁이 비롯되는 싹을 틔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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